신규 입고된 "박영선,문신,장욱진,조희룡,황유엽"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본문
<박영선>
그의 천부적 그림재능은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반때인
1931년에 당시 가장 권위있는 미술가 등용문이던
서울의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풍경을 그린 유화가 첫 입선한데 이어,
다음 해에도 여인상의 작품이 거듭 입선함으로써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호전적인 미술 작품을 전시한 결전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한 이유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가운데 미술부문에 포함되었다.
정치 논리가 미술에 개입하는데 대하여 반대하고 순수미술을 옹호하여 우파적 입장을 개진.
누드화, 여성을 소재로 한 인물화를 즐겨 그렸다.
색채와 구도를 강조하는 화풍은 서양화의 우아함과 세련됨이 가득하여
현대적인 느낌을 주며, 여성의 얼굴도 서구형으로 묘사되었다.
프랑스 유학 후 추상회화로 전환하게 되었다.
정물 , 45 x 33cm(8P) , 캔버스에 오일
정물 , 41 x 53cm(8P) , 캔버스에 오일
박영선(1910-1994)
1931 평양고선 졸업반에 조선미술전람회(서울) 첫입선
1936 일본 천단미술학교 졸업
1937 상공회의소 첫개인전(평양) 제16회 선전 입선
1944 개인전 삼월백화점(서울)
1948 이대 미술학부 교수
1953~1955 홍익대 미술학부 교수
1955 도불기념전 미도파화랑(서울)
1955~1959 파리 아카데미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수학
1955~1974 국전심사위원
1956 파리국제미술적 초대출품
1968 삼일절 문화상 수상
1975 제24회 가을국전초대작가 출품 개인전 진화랑(서울)
1976 미국 콜롬비아대학 명예 예술학박사
1982 국민훈장문화장 포상
1987 백송화랑 초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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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평양출신.
17세때에 아동미술작품 공모전에 출품함으로써 화가 등단.
평양 삭성회 회화연구소와 일본의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졸업.
1939년 서울에 정착한 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신개지(新開地)(1940년, 한국산업은행 소장)등이 특선에 올랐다.
1943년에는 여인상을 그린 실내한정(室內閑靜)이 특선 및 창덕궁상을 차지하였다.
이 시기 동경의 문부성미술전람회[약칭 문전(文展)]에도
산과 서울(1941년, 삼성미술관) 등이 거듭 입선하였고,
1944년에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당시의 작품은 서정적이면서도 사실주의적 경향의 화면 구성과
생동적인 색채 구사로 두드러진 기량을 나타냈다.
그 뒤로는 우아한 한복 여인상, 또는 누드 모델을 그린 나체화를 많이 그리며
한층 충실한 사실성과 밝은 감정의 표현을 지향하였다.
이때부터 여인의 얼굴은 모두 갸름하고 코가 오똑한
서양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지며 독특한 취향을 형상화하였다.
1955년에 파리로 가서 3년간 제작 생활을 하는 동안
아름다운 파리 여인의 누드와
그 밖의 서양 여성들을 모델로 하여 그리게 되면서 박영선의 전형적 여성상이 더욱 선명해졌다.
이 전형성은 그 뒤 한국의 농촌 여인상에서도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반복되어 비현실성이 약점으로 지적되곤 했다.
그러나 파리 시기에는 현대적 추상주의와 구성주의를 시도하기도 했고,
여인상·정물·풍경의 화면 구성을 자유롭게 변용하여 신선한 창작성을 보여주었다.
1958년 귀국한 뒤에는 도불(渡佛)전에 이미 추천 작가,심사 위원으로 참여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國展)]에 다시 해마다 참가하며
한국의 향토적인 정취와 농촌 생활의 정경을 주제로
따뜻한 회색조 분위기의 작품을 출품했다.
그러나 전형적인 실내 여인상과 누드 여인상도 끊임없이 그려졌다.
향토적 주제의 대표작으로는 농부의 가족(1970년,국립현대미술관)등이 있고,
누드 걸작은 파리 시기의 작품이 두드러진다.
홍익대학(1953∼1955년),서라벌예술대학,중앙대학교(1960∼1976년 정년)의 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역임하였다.
<문신>
문신은 1940년대 중반 한국에서 화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회화는 인상파, 표현주의, 입체주의 등 서구 사조를 흡수하여
다양한 양식과 기법을 실험하며
인물, 정물, 풍경 등의 사실화 계열의 구상작업을 주로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단순화, 평면화, 추상화 되어가는 회화경향을 보인다.
1961년 초 파리에 정착 하여 추상작업으로 전환하고
프랑스 옛 성 라브넬 수복작업을 통하여
입체에 대한 잠재성을 발견하고 본격적으로 조각작업을 시작했다.
1970년 프랑스 발카레스 조각심포지엄에 참여하여
<태양의 인간>을 세우면서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렸고
영구 귀국하여 서울올림픽 공원에 그의 대표작 <올림픽1988>을 세우면서 많은 명성을 얻었다.
문신의 조각은 좌우대칭의 추상조각으로 대표되며
미세하게 불균형하고 비대칭인 특징이 작품에 내재해 있어
생명체와 같은 자연스러운 형상을 띤다.
그의 조각은 복잡해 보일지도 원과 선의 자연스러운 결합과 변화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곤충, 식물, 인간 등의 구상적 형상을 연상시킨다.
흑단, 주목, 돌, 브론즈, 스텐레스 스틸 등과 같은 견고한 재료를 사용하였으며
표면을 끊임없이 갈고 닦는 과정을 반복하여
조각의 표면이 윤기 나는 것이 특징이다.
풍경 , 34 x 20.5cm(5M) , oil on paper
문신 / 조각가,화가
1923년
일본에서 1월16일 출생
1939~1945년
도쿄(일본)에서 거주하며 동경미술학교의 학업을 지속하기 위한 어려웠던 고학시절
1947~1949년
서울의 東和畵廊(現신세계)에서 12회의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한다.
1960
1961~1965년
최초의 파리에서 거주하며 외국인과 프랑스 여러 작가들과의 교류를 가지며
결연하게 "추상화"의 창작에 들어간다.
1965~1966년
한국으로 되돌아와 홍익 미술대학에서 강의한다.
그의 작품은 개인적인 대상이 된다.
재도불전을 신세계 화랑에서 개최한다.
1967년
파리에 정착한다.
1970
1970년
그의 작품 세계의 발전에 돈독한 영향력을 끼치는
예술 세계의 효력 있는 몇몇들과 교류를 가지며 여러 그룹전에 참가한다.
프랑스 포르-바카레스의 야외 미술과
국제 조각 심포지엄에서 나무로 된 13M 높이의 토템을 제작했다.
프랑스 몽따르지에서 호화의 페스티벌,
파리의 쌍트 쥬느 비에브에서 현대 조각전,
독일 함부르크 반데르 호화랑에서 삶과 조각전,
프랑스 트르와에서 예술과 마티에르전
1971~1971년
그는 수 많은 싸롱전과 화랑에서 작품을 발표했다.
파리에서 아르 꽁딱전의 개막전시회에 6명의 조각가와 참가,
아르 2전,
스위스 발르에서 국제 예술시장전,
성(聖)적 예술쌀롱전을 파리에서 프랑스 뻬르삐냥의 테레즈 루쎌 갤러리에서 현대조각전,
파리의 그랑빨레에서 그랑 에죤느 도쥬르딕전,
파리에서 색채의 생활전,
국제조각의 3월 쌀롱전을 파리의 전철역 쌩-오규스트에서,
파리의 현대 미술관에서 쌀롱드 메전,
파리의 크라반 화랑의 개막 전시회
1973~1975년
文信은 지속적으로 유명한 쌀롱전과 그룹전을 프랑스와 외국에서 참여한다.
파리의 그랑빨레에서 그랑에 죤느 도쥬르듸전.
파리의 조각센터에서 조각작품에서 나무의 역할전,
쌍-제르만-엉레에서 거대한 조각.
공간을 위한 형태전.
현대예술의 국제교류전을 프랑스의 라 로셸의 페스티벌에서
프랑스의 막끄-엉-바로이으의 쌥 덩 트리옹 화랑에서
삶과 형태의 그룹과 함께 미학을 위한 도시의 활력전.
파리의 파리스꾸뜨에서 조각 75전,
이태리에서 국제 야외 조각전
1975년 그의 조각과 뎃상작품으로 독일 함부르크의 맨슈화랑을 초대전을 획득한다.
프랑스와 외국에서 수많은 전시회에 참가한다.
(파리의 라데팡스에서 쌀롱 드 메전,
파리의 슈포르화랑에서 삶과 형태의 그룹전,
이란의 테헤란에서 현대 예술전,
한국의 진화랑(서울).
귀향전(마산)초대전
1977년
프랑스에서 지속적으로 전시회를 갖는다.
파리의 라데팡스에서 쌀롱 드 메전,
파리의 그랑빨레에서 그랑에 죤느 도쥬르듸와 꽁빠레죵전,
프랑스의 뽕뜨니-슈르-부와에서 조각 쌀롱전,
프랑스에서 현대미술 페스티벌전,
파리의 현대조각센터에서 현대조각전
1978년
파리에서 쌀롱 드 메전(라데팡스),
파리의 그랑빨레에서 그랑에 죤느 도쥬르듸전,
파리에서 삶과 형태의 그룹전,
프랑스의 뚜르에서 예술의 페스티벌 1978전,
파리의 메트르알베르화랑에서 전시회
1979년
문신은 파리의 그룹 전시회에 항상 참여했다.
파리의 그랑빨레에서 그랑에 죤느 도쥬르듸 전,
파리에서 삶과 형태의 그룹전,
파리의 메트르 알베르 화랑의 전시회,
프랑스 오를리 슈드 전,
파리에서 삶과 형태의 그룹전,
파리의 메트르 알베르 화랑의 전시회,
프랑스 오를리 슈드국제 공항의 예술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후
한국으로 귀국해 서울의 현대화랑에서 초대전을 개최한다.
1980
1980~1988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 국제전에 한국대표로 참여, 유럽 5개국 순회회고전을 갖는다.
1971~1971년 문신은 이 시기에 매년 한국에서 전시회를 개최한다.
1980년 부산의 수도화랑과 국제화랑에서 초대전,
1981년 서울의 미화랑에서 초대전,
1983년 서울의 신세계화랑에서 초대전,
1986년 서울의 예화랑에서 초대전,
1987년 한국화랑에서 회화 작품 초대전,
1988년 서울올림픽 경기 일원으로 개최된 예술의 올림피아드에서
문신은 25m높이의 스테인리스 스틸의 "올림픽의 조화"를 올림픽 공원에 제작하여 세웠다.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 국제전에 한국대표로 참여하면서 유럽 5개국 순회회고전을 갖는다.
1990
1990~1991년
그의 작품의 유럽순회 회고전을 실행한다.
1990년 파리의 아트센타에서 초대전 쟈그레브 Prostor 박물관의 전시회,
1991년 부다페스트의 역사 박물관의 전시회와 동시에, 서울에서도 전시회를 개최한다.
1990년 서울의 빈켈화랑 초대전, 1991년 서울의 빈켈화랑에서 초대전,
그는 그의 고향 마산에 자신의 재단인 문신 미술관을 일반에게 공개하며,
반세기에 걸쳐 제작한 그의 총괄적 작품을 영구히 전시한다.
1992년
프랑스 쌀롱 드 메 초대 출품.
프랑스 쌀롱 레알리떼 누벨 초대 출품.
프랑스 사롱,
그랑에 즌느 도오주르디 초대출품.
프랑스 예술문학 영주장 수여,
제 11회 대한민국 세종문화상 (문화부문)수상
1993년
중앙일보 미술대전 운영위원, 문신예술 50년 초대전(조선일보사,문화방송 공동주최)
1994년
문신 미술관 개관
1995년
경남대학교 명예문학박사, 대한민국 금관 문화 훈장 추서
1995년
5월 24일 05시30분 지병으로 타계함.
문신조각 원형전. 광복50년 문신예술50년 멀티영상쇼(문신미술관),
문신유작전 (서울 예화랑, 한국일보사 후원)
1996년
문신 추모 1주년 흑단/친필 자료전(문신미술관)
1996년 9월
마산 MBC문화방송 초대전
1997년
"3인의 한국예술가", 카루젤 드 루브르, 파리
1998년
"문신, Wooden Symmetry, 가나아트 갤러리, 서울
2000
2000년
새천년 밀레이엄 행사 : 조각 카퍼레이드 참가(CNN 37개국 동시 위성중계) "문신타계5주기전",
가나아트 갤러리, 서울 홍콩세계 보석전, 홍콩
2001년
대한민국 국정 홍보처 해외 홍보관 상설전시, 북경 한국 문화원
2004년
"A Reflection of Korea", 뉴욕 주미 UN 한국대표부
2005년
문신10주기 기념전 : 마산시립문신미술관,
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
가나아트센터 공동주최
제3회 발렌시아 비엔날레,
CENTRE DEL CARME,
발렌시아
2006년
2006월드컵기념 독일바덴바덴문신초대전
(마산시, 독일바덴바덴시 공동주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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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1986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회 부위원장
1987~1995 문신미술관 이사장
[수상]
1991 예술문학기사 훈장
1994 제11회 세종문화상
1995 금관문화훈장
<장욱진>
"술과 그림의 나날" 장욱진은 그렇게 살았다.
그림은 살아가는 이유였고
술은 그림의 노동을 달래주는 달콤한 휴식, 또는 삶의 충전소 같은 것.
한번 붓을 잡으면, 한번 술잔을 잡으면
죽기를 작정한 듯 빠져들었다.
臥遊江山 [와유강산] , 32 x 42cm(약7호) , 한지에 수묵
장욱진
1918 - 1990
한국근현대미술사의 거장으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공부보다는 그림에 열중하며 남다른 재능과 관심을 보였다.
경복중,고등학교 미술반에서 공부를 하며
당시 유행하던 입체파와 피카소의 미술세계를 접했다.
일본인 역사 교사에 항의한 사건으로 퇴학을 당한 장욱진은
20세에 양정고보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고
공기놀이라는 작품으로 조선일보 주체 전조선 학생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양정고보 졸업 후 1939년 일본 동경의
제국미술학교 서양학과에 들어가 1943년 졸업하였다.
해방 직 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잠시 근무하였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1954-1960)로 봉직한 후에는
덕소, 수안보, 신갈 등에 화실을 마련하여 그림에만 전념했다.
장욱진의 작품은 가족, 산과 들, 까치와 나무, 마을과 집 등 주변풍경의 이미지가
친근하고 정감있게 표현되어 단순한 삶을 추구했던 작가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작은 캔버스 안에 간결한 대상의 처리와 조형성으로
밀도 높은 균형감을 느끼게 해주며
동양적 철학사상이 깃든 향토적이고 서정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인의 삶과 그 주변의 자연환경을 주제로
동화적인 풍부한 상상력과 풍류적 감정 표현이 내재된 그의 작품은
거의가 작은 화면에 간결하고 밀도 있는 선과 독창적인 색채로 형상화하였다.
마치 아동화 같으면서도 해학적인 그의 그림은
작가의 어릴적 체험과 추억을 이야기하듯
자유로운 풍류와 동심이 깊게 베인 독특한 화풍을 남겼다.
장욱진은 주변에 싫은 소리 한번 안하고 평생을 선비처럼
유유자적하며 살았지만
개성이 강하여 기인적인 면모와 일화도 많이 남긴 예술가였다.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 다 써버릴 작정이다.
그림과 술로 고생하는 나나 그런 나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내처나
모두 고생을 사서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좋은데 어떡하나.
평생 자기 몸 돌보다간 아무일도 못한다."라고 했던
장욱진의 인생 철학처럼 순수하고 군더더기 없는
장욱진의 작품을 보노라면 심오한 세계가 느껴진다.
장욱진은 1947년에서 1952년까지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과 신사실파 동인전 활동을 했다.
동시대의 화가들이 거대한 추상화를 그리며 대접을 받던 시대에
장욱진은 독자적으로 향토적 소재를
모더니즘에 접목해 작고 예쁜 동화적 화풍을 개척한 선구자였다.
국전 추천작가와 초대작가, 심사위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였고,
1986년 중앙일보사가 제정한 중앙예술대상을 수상하였다.
본관이 結城인 아버지 張基鏞과 어머니 李基在의 둘째 아들로 났다.
1923-7세 고향에서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1924-8세 경성 사범 부속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26-10세 보통학교 3학년때 일본 히로시마 고등 사범학교가 주최한
전일본 소학생 미전에서 일등상을 받았다.
1930-14세 경성 제2고등 보통학교(지금의 경복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32-16세 경성 제2고보를 중퇴했다.
성홍열을 앓아 이 후유증을 다스리기위해 만공 선사가
계신 예산 수덕사에 가서 6개월동안 정양했다.
1936-20세 체육특기생으로 양정 고등 보통학교3학년에 편입했다.
1937-21세 조선일보가 주최한 제2회 전조선 학생 미술 전람회에
<공기놀이>등을 출품하여 최고상인 사장상과 중등부 특선상을 받았다.
1939-23세 양정 고등 보통학교 졸업(2회),
4월에 일본 동경의 제국미술학교(지금의武藏野美術大學)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1940-24세 선전에 출품, <소녀>가 입선됐다.
1941-25세 4월 12일 이병도 박사의 맏딸 李舜卿(1920년 9월 3일생)과 결혼했다.
1942-26세 장남 正凉 났다.
1943-27세 9월, 제국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선전에서 <언덕>이 입선됐다.
1945-29세 지난해 겨울에 일제에 끌려 징용에 나갔다.
징용나간지 9개월만에 해방을 맞았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 취직했다.
장녀 暻洙 났다.
1947-31세 국립 중앙 박물관을 사직했다.
덕수 상업 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차녀 喜凉 났다.
1948-32세 12월,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과 1947년 결성한
신사실파 제1회 동인전(화신백화점)에 출품했다.
1949-33세 11월, 제2회 신사실파 동인전(동화백화점)에 유화 13점을 출품했다.
1950-34세 내수동 집에서 살다가 6.25동란을 맞았다.
1951-35세 1월초 부산으로 피난했다.
여름, 종군 화가단에 들어 보름동안 그림을 그렸다. 종군 작가상을 받았다.
초가을에 고향 내판으로 갔다.
거기서 물감을 석유레 개어 갱지에다 자화상을 포함 40여점의 그림을 그렸다.
3녀 專洙 났다.
1953-37세 5월말, 국립 중앙 박물관 화랑에서 열린
제3회 신사실파 동인전에 유화 5점을 출품했다.
휴전직후 환도해서 유영국의 신당동 집에서 6개월 동안 살았다.
1954-38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대우교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4녀 允美 났다.
1955-39세 백우회 제1회전에 <樹下>라는 제못의 그림을 출품,
독지가의 이름을 딴 "이범래씨상"을 받았다.
1957-41세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동양 미술전에 출품했다.
1958-42세 뉴옥의 월드하우스 갤러리가 주최한 한국 현대 회화전에
<나무와새>(1957)등 유화2점을 출품했다.
국전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국전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것은 모두 세차례(7,8,17회)였다.
1960-44세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사직하였다.
1961-45세 경성 제2고등 보통학교 출신 화가들이 모여 2.9동인회를 만들었고,
국립도서관 화랑에서 열린 제1회 동인전에 유화 2점을 출품했다.
1963-47세 경기도 덕소의 한강가에 상자모양의 슬리브 양옥을 짓고
그곳게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1964-48세 11월 2일~8일에 반도화랑에서 유화 20점을 가지고 제1회 개인전을 열었다.
차남 洪淳 났다.
1967-51세 앙가주망 동인전에 5회존부터 참여했다.
1970-54세 정월, 불경들을 공부하던 부인의 모습을 담은 <진진묘>를 제작하였다.
1974-58세 4월 12일~18일에 공간화랑에서 32점의 유화를 걸고 제2회 개인전을열었다.
1975-59세 덕소 생활을 청산하고, 명륜동 양옥뒤의 한옥을 사서, 거기에 화실을 꾸몄다.
집에 모시고 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1976-60세 백성욱박사와 함께 자주 사찰을 찾았다.
인연으로 부처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같은 불교적 그림을 그렸다.
잡지, 신문의 권유로 적었던 글들을 모아
「강가의 아틀리에」라는 수상집을 냈다.
1977-61세 여름에 양산 통도사에 가서 경봉스님을 만났다.
선시와 "非空"이라는 법명을 주셨다.
법당 건립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백지에 도화를 그려
현대화랑에서 비공개 전시회를 열었다.
1978-62세 2월 23일~28일에 현대화랑에서 윤광조의 분청사기에
그림을 그린 도화전을 그렸다. 37점 출품.
1979-63세 차남 洪淳 잃었다.
10월 11일~17일에 화집발간 기념 전시회를 현대화랑에서 열었다.
유화 25점, 판화13점, 먹그림 8점을 전시했다.
겨울에 수안보 온천뒤 탑동마을의 농가를 한채샀다.
1980-64세 봄부터 수안보의 농가를 고쳐 화실로 쓰기 시작했다.
1981-65세 10월 11일~17일에 공간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유화 20여점과 먹그림을 에칭판화로 옮긴 그림 5점을 전시했다.
1982-66세 7월 중순, 여류화가들과 함께 미국 여행을 했다.
유화 3점과 실크스크린, 에칭판화, 그리고 먹그림을 가지고 가서
로스엔젤레스의 스코프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1983-67세 3~4월에 유럽여행을 했다.
10월 22일~29일에 淵화랑에서 새로 제작한 석판화 4점과함께
판화집 출판기념 판화전을 열었다.
1985-69세 여름에 수안보 화실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주했다.
1986-70세 정월 보름부터 이월말까지 부산 해운대에서 제작한 유화 8점과
먹그림 소묘를 모아 6월 12일~19일에 국제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미대 제자들이 모여서 고희잔치를 열어주었다.
봄부터 경기도 용인군 구성면 마북리에 있는 오래된 한옥을 사서 보수했다.
7월 초에 입주했다.
가을에 중앙일보가 제정한 예술대상의 수상자로 지명됐다.
1987-71세 2월에 대만과 태국을 여행하였다.
5월 28일~6월 6일에 두손 화랑에서 화집을 내고 개인전을 열었다.
유화 80점을 출품됐다.
여름, KBS TV의 원로 탐방 프로 "뵙고 싶었습니다"에 출연했다.
추석즈음 고향의 아버지 묘소에 비석을 세웠다.
1988-72세 1월에 인도로 여행, 뉴델리 박물관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12월 발리섬으로 여행했다.
1989-73세 7월, 한옥 옆에다 양옥을 완성하고 입주했다. 가을, 미국 뉴저지주의
"버겐 예술-과학박물관"에서 개최된 한국 현대화전에 유화 8점을 출품했다.
1990-74세 가을, 아주 오랜만에 고향의 생가를 방문했다.
미국의 "한정판 출판사(Limited Editions Club)"에서 선정한 한국 관련 책에 그림을 맡기로 위촉되었다.
12월 27일, 갑자기 발병, 오후4시에 한국병원에 선종했다.
12월 29일 오후 1시, 수원 시립장제장에서 제자및 미술계 인사들이 모여
영결식을 가졌다.
<조희룡>
매화 , 42.5 x 95cm(약21호) , 한지에 수묵담채
우봉 조희룡
서울 출생
1789년(정조13) ~ 1866(고종3) - 조선후기의 화가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치운(致雲)
호는 우봉(又峰),석감(石?),철적(鐵笛),호산(壺山),단로(丹老) 또는 매수(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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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金正喜)의 문인이다.
1813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1851년 왕실전례(王室典禮)에 개입되어
전라도 임자도(荏子島)에 유배되었다가 1853년에 귀향하였다.
19세기 대표적 여항시사인 벽오사(碧梧社)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고
58세에는 헌종의 명을 받아 금강산의 명승지를 그리기도 했다.
유배 중에도 자신의 거처에 예서체(隷書體)로 쓴
화구암(畵鷗?)이라는 편액을 걸고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여 기량이 더욱 완숙해졌다.
그는 시,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난 재주를 보였는데,
글씨는 추사체(秋史體)를 본받았고, 그림은 난초와 매화를 특히 많이 그렸다.
난초 역시 김정희의 묵란화(墨蘭?)의 정신을 본받아 그렸다.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이라는 자서전적인 저술과
그 당시의 미천한 계층 출신의 인물 중 학문,문장,서화,의술,점술에
뛰어난 사람들의 행적을 기록한 일종의 열전적인 저술인 호산외사(壺山外史)를 남겼다.
특히 여기에 수록된 일곱 명의 화가(김홍도,최북,임희지 등)들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인물 묘사와 그들 상호간의 교우 관계의 기록은
조선 후기의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유작 중 가장 많은 수가 매화 그림인데
이와 같은 자신의 매화벽(梅花癖)을 석우망년록에 상세히 적었다.
자신이 그린 매화 병풍을 방 안에 둘러치고
매화를 읊은 시가 새겨져 있는 벼루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藏烟)이라는 먹을 사용했으며,
매화시백영(梅花詩百詠)을 지어 큰 소리로 읊다가
목이 마르면 매화편차(梅花片茶)를 달여 먹었다.
그리고 자기 거처를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고 이름 짓고
자신의 호를 매수(梅?)라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현재 간송미술관 소장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는
이와 같은 그의 생활 주변의 모습을 표현한 듯한 재미있는 그림이다.
매화그림 중 그의 새로운 구도적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은
길고 좁은 축화(軸?: 두루마리 그림) 형식의 그림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홍매대련(紅梅對聯)을 들 수 있다.
굵은 노수간(老樹幹: 늙은 나무의 줄기)이
힘찬 용의 꿈틀거림과 같이 두세 번 크게 굴곡지면서 화폭의 높이를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중 몇 군데로부터 꽃을 가득히 피운 가느다란 가지들이
사방으로 힘차게 뻗어 나가 주간(主幹)과 서로 대조와 조화를 이룬다.
- 비백법(飛白法)
서예에서 굵은 필획을 그을 때
운필(運筆)의 속도와 먹의 분량에 따라서
그 획의 일부가 먹으로 채워지지 않은 채
불규칙한 형태의 흰 부분을 드러나게 하는 필법)을 사용한 수간에는
역시 대조되는 윤묵(潤墨)의 짙은 점을 찍어 요소요소를 강조하였으며
매화꽃은 몰골법(沒骨法: 그림을 그릴 때 윤곽을 그리지 않는 화법)으로 그렸다.
그의 백매화(白梅花)는 율동적인 경쾌한 붓놀림으로
꽃잎 하나하나의 윤곽선을 그리고 예리한 선으로 꽃술을 장식하였다.
이들 그림에는 항상 추사체 글씨의 화제(?題)를 곁들여 문인화다운 운치를 더욱 북돋았다.
그의 묵매화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 이래의
조선 중기 묵매도의 구도에서 탈피하여 후기 묵매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김정희는 조희룡의 난초 그림이 서법에 의한 문인화답지 않게
아직도 화법만을 중시하는 태도를 면하지 못하였다고 낮게 평가하였다.
하지만 그의 묵란화들을 보면 절제 있고 힘찬 필선으로 된 우수한 작품들이 많다.
<황유엽>
재회 , 46 x 53cm(10F) , 캔버스에 오일
황 유 엽
1916 평남 - 2010년 10월
개인전
1976 문화화랑
1977 부산 현대화랑
1978 길화랑 개관 초대전
1983 진화랑
1985 선화랑
단체전 및 초대전
1940 주일화전창립위원(5회출품)
1951 국방부종군화가
1957 창작미술협회전 창립위원 (5회출품)
1958 아시아 현대작가 초대출품 (서울)
1964 동경올림픽 한국미술전 출품, 서라벌 예술대학 강사
1966 말레이시아 초대전 출품
1969 국전초대작가
1972 한국근대미술 60년전 출품
1973 국립현대미술관 개관전 출품
1976 제12회 아시아 현대작가전 출품 (동경)
1977 한국현대작가 초대전 (한국화랑)
1978 초대전 출품 (진화랑, 조형화랑, 희화랑)
1978 제14회 아세아 현대미술전 출품 및 대표로 참가
1982 한중현대서화전 (국립현대미술관)
1983 ~ 1985 '83-'85현대미술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1985 현대미술40년전 (국립현대미술관)
1986 한국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전 (국립현대미술관)
1987 '87현대미술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 한국인물화전 (호암갤러리)
1990 한국미술-오늘의 상황전 (예술의전당)
1992 원로작가 회화전 (국립현대미술관)
1993 전관개관기념 현대미술전 (예술의전당) / 서울국제현대미술제 (국립현대미술관)
음악과 무용의 미술전 (예술의전당) 외 다수
수상 및 역임
1930 전국학생미술전 1등상
1940 조선미술전 입선(3회)
1953 제 2, 9, 10회 국전특선
1976 미술공로, 교육공로상
1993 세종문화상(문화부문,대통령)
구상전상 제 1호 ( 구상전 회장 12회)
보관 문화 훈장 (대통령)
서울시 문화상 (시장)
대한민국 기독교 미술상
주호화전 창립위원 / 창미회 창립위원, 국전심사위원 / 한국미술협회 서양화분과위원
/ 국전초대작가 / 대한민국미술대전심사위원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역임
50년대 후반부터 실질적인 작품활동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실향의식을 바탕으로 한국인의 체질적 인성을 상징하는 우직한 소의 모습을 표현함.
황소의 등허리에 얹혀 가는 목동들의 모습, 또는 소와 여인의 모습,
단오같은 '현상붙은 소' 등 다양한 환경에서의 소를 묘사함
삶의 체험이 내재된 몸짓!
황유엽의 예술세계는 이 작가가 걸어온 행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그 삶의 체험이 내재된 또 다른 그의 몸짓이라 할 수 있다.
거친 선과 둔탁한 마티에르 위로 격렬하게
때로는 그지없이 정겹게 묻어 나오는 심상풍경의 어느 단편도
그의 삶의 흔적과 밀착되지 않은 것은 없다 할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일그러진 형상, 외면적으로 퍼져 나오는 강렬한 색조의 울림 가운데
작가의 다난했던 과거(전쟁의 체험), 역경을 딛고 일어선 현재,
미래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읽을수 있다.
그는 생명을 지닌 모든 것에 애정 어린 눈길을 돌리고,
삶 그 자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음미하려 한다.
그의 작품을 대하면 한점 한점 모두가 생명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과 동물(소)이 자주 작품 소재로 등장되고 있다.
이 둘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느낄 수 없는 따스함이 그 근저에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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