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표작가의 작품들 입고...한희원,김일해작가의 작품소개
본문
한희원작가 [그 해 겨울] 41 x 32cm (6호F)
겨울의 고적함을 한희원 특유의 서정적 회화로 표현한 작품으로 감상자에게 차가와서
오히려 청아한 겨울의 느낌과 함께 따스한 인간애를 동시에 가진 작품이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존재의 근원을 묻는 서정적인 회화로 우리들에게
깊은 위로를 안겨주는 한작가의 작품은 늘 詩처럼 우리들 가슴에 노크를 하고간다.
한희원 (HAN HEE-WON)
1955년 광주출생
조선대학교 미술교육과 졸업
개인전33회
1993 경인미술관(서울)
남봉갤러리, 인재갤러리(광주)
1994 갤러리 그림시(수원- 개관기념초대)
나의 사랑 양림 언덕전(양림교회 90주년 기념-양림교회-광주)
1995 송원갤러리(광주)
1998 나인갤러리(광주)
1999 신세계갤러리(광주)-내 영혼의 깊은 강가
2000 궁전갤러리(광주)-삼일간의 짧은 여행의 기록
2001 나인갤러리(광주)-큰 참나무 한그루
2002 인재갤러리(광주)-바람을 따라 길을 걷다
2003 순천문화예술회관(순천)-별과 바람과 나무와 시
남구종합문화예술회관(광주)- 거리에서 만난 문학과 미술
2004 들꽃피네 전시실(광주)
2005 갤러리 상(서울)- 고독과 자유의 침잠, 안개와 바람 外
단체전및 초대전
1976~92 사다리전(광주)
1984 "84"광주전(광주
1985 목판화 4인초대전(화니미술관,광주)
1986 임술년전(서울,대구,부산)
1987 광주 목판화 연구회전(가든미술관,광주)
1987~90 광주청년작거전(인재갤러리,광주)
1988 "88광주동향전(금호문화회관,광주)
1989~94 오월전(광주)
1989 찾는 미술-장터전(구례장터_
1990 광주 목판화 연구회전(인재갤러리,광주)
전라도 사람들전(가든미술관,광주)
전남연극제 무대미술상 수상
장터전(광양장터,순천아랫장터)
1990~94 일하는 사람들전(광주)
1992 삶의 현장저(인재갤러리,광주)
-민들레 피는 땅-3인전(그림마당 민,무등예술관)
JAALA전(동경미술관,일본)
꽃그림 소품전(인재갤러리,궁동갤러리-광주)
1992~93 빛고을전(인재갤러리,궁동갤러리-광주)
1993 광주미술공동체 현장 스케치전(궁동갤러리,광주)
코리아 통일미술전(일본)
지역작가 동향전(롯데화랑,서울)
1994 "94청담미술제(무진화랑,서울)
민중미술 15년전(국립현대미술관,서울)
좋은작가 8인전(갤러리 아그베,광주)
송년그림 초대전(갤러리 타임,서울)
사실정신전(서경갤러리,서울)
1995 개관3주년 기념초대전(갤러리 아그베,광주)
오늘의 지역작가전(금호갤러리,서울)
씻김굿전(백년갤러리,광주)
사실정신전(송원갤러리,광주)
광주통일미술제(광주)
1996 사실정신전(다다갤러리,부산)
오지호 미술상 기념전(시립미술관,광주)
시인 김남주 추모그림전(나의 고향그리기,송원갤러리-광주)
1997 누드로 만나는 16인전(나인갤러리,광주)
쌍인화랑 기획 인기작가 4인전(신세계갤러리,광주)
섬진강 260km 도보종주 스케치
反-풍경전(동아미술관,서울)
광주전(송원갤러리,광주)
크드로 본 그림전(원화랑,광주)
LG 41인전(LG화랑,서울)
1998 한국정신 남도의 운치전(롯데화랑, 부산)
3가지 중심으로 한국미술을 여는 키워드(롯데화랑,부산)
제2회 광주비엔날레 기념전(나인갤러리,광주)
수원화성 아트페어전(수원문예회관,수원)
새로운 천년을 위하여(광주시립미술관,광주)
CAPPING전(일본)
남도문화 원류를 찾아서(신세계갤러리,광주)
1999 JAALA전
독북아와 제3세계 미술전(서울시립미술관)
코밀 개관기념전(광주)
2000 광주 롯데화랑 개관2주년 특별기념전(집단창작촌 프로젝트)
남도가사문학의 전통과 현대미술의 만남(광주신세계미술관)
조태일 시인 추모그림전-모정무한전(학고제,서울)
2001 신춘기획-뱀(광주시립미술관)
문예진흥원미술관 기획공모-흩어지다-전
영남·호남 그리고 충청(대전 시립미술관)
섬진강 연어 사랑전(화개농협)
기획-2001 일탈전(나인갤러리,광주)
독도사랑(한국전업미술가협회)
무등회 대작전(21세기 및의 조명)
현대아트갤러리(교감전)
궁동화가들(궁동갤러리)
무등예술관 기획「2002 광주비엔날레 비상전」
6·15 남북정상회담 23주년 기념「우리는 하나로」
국도 1호선「남북의 길」전(공평아트센타)
2002 젊은 예술가의 초상(광주신세계)
2003 7일 예향의 숨결전(서울 조선화랑)
2004 야생화 낮은 꽃의 노래(광주신세계)
생명의 근원을 찾아서(자미갤러리)
2005 감정과 셀러드(일산 호수갤러리)
도시의 허파(광주시립미술관 분관)
100인 100색초대(서울 조선화랑)
오아시스 광주(광주 신세계)
원동석 교수퇴임기념전(목포문화예술회관)
광복 60주년 기념 역사속의 현장과 인물(광주나인갤러리)
무등전 국제회화제(김대중 컨벤션센타)
사다리 30주년 기념전(광주시립미술관분관)
문학과 미술의 만남전(자미갤러리)
빨간우체동에 말을 걸다(광주신세계갤러리)
現, 사다리, 새벽회, 무등회, 전업미술가협회
김일해작가 [겨울바다] 35 x 27cm (5호F)
겨울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그러나 맑은 하늘아래 오후 햇살을 받은 산등성이는 봄날 같은 여유를 부리게 했다.
나는 언제부턴가 겨울산과 겨울나무가 좋았다.
검푸른 소나무들과 나목이 된 나무숲은 마치 크림을 많이 넣은 커피 색 같다.
단풍의 계절 가을은 너무 현란한 색채로 정신을 빼앗아 간다.
그러나 겨울나무는 하나의 이파리도 갖지 않은 채 차가운 겨울 하늘에 온몸을 내맡기고 있는 그 당당함이 좋다.
삭풍은 마른 이파리를 날려 보내고, 거기다 죽은 가지마져 앗아간다.
죽은 듯 뻗어있지만 겨울을 이겨낸 가지는 살아있는 것들이다.
김일해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졸업
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 겸임교수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대한민국 청년비엔날레 운영위원장
한국미술 작가상 수상
오늘의 미술가상 수상*개인 초대전 38회(1984 ~2010 뉴욕,파리,동경,북경,서울 등)
*ART KOREA 표지작가초대전(2010 서울미술관)
*A&C artfair 초대출품(2010,서울미술관)
*C-KOAS전(2009,북경상상미술관)
*동방의빛-한.중 정예작가대작전(2009,북경 798 인갤러리)
*동방의빛-한.중 정예작가대작전(2008,서울미술관)
*서울미술대전초대출품(2007 ~2009, 서울시립미술관)*KIAF전(2007, 무역센터,서울)
*MANIF 특별상 수상작가전(1998~2007, 예술의전당,서울)
*한국구상대제전 (2005 ~ 2008, 예술의전당,서울)
*한국현대미술현장과검증전(2007, 예술의전당,서울)
*빛나는한국의화가전(2006 인사이트센터,서울)
*Best Star &Best Artis 전 (2003 ,예술의전당,서울)
*Seoul-Paris 전 (2003 ,파리컨벤션센터,파리)
*남북평화미술전(1995 ~2008,동경,오사카 등)
*국제판화미술제(2004,예술의전당,서울)
*문학인의초상전(2002,국립현대미술관,서울)
*한국정예작가전(1991 ,동경아트센터, 일본)
*국제아트페어 20여 회 참가
(2002 ~ 2008, 뉴욕,제네바,마이애미,시드니,상해,북경,라스베가스,오사카,이스탄불,모스크바 등)
*단체전 및 국내외 부스 초대전 500여 회 출품
현) 한국미술문화포럼 대표
동방의빛-한중교류전 회장
“단순하면서도 내면 담아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신자연주의, 채색주의 화풍 가진 화면의 지휘자
선생의 화풍에 대해 미술평론가 박용숙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대부분 자연 풍경을 다루고 있지만, 인위적인 풍경요인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인위적으로 꾸며진 경관이 그의 그림에서는 마치 비인위적인 자연 풍경처럼 보임으로써,
그의 그림의 뛰어난 예술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김일해의 풍경화를 채색주의 풍경화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말은 그가 자연을 순수하게 색채를 이해하거나 반대로 색채로 풍경을 재구성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길고 굵은 곱슬머리를 뒤로 넘기고, 적당히 콧수염을 기르고 있는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의 그림에 대해 신자연주의 혹은 채색주의라고 하는데 이 말에 동의하시는가요?”
“그렇게 봐주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림은 사진이 아니며, 실사도 아닙니다. 높은 산을 낮게 하거나 멀리 또는 가까이 재구성하는 것이 작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통해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조율하듯 전체 화면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어떤 작가들은 여행을 하면서 도로변에서 좋은 풍광을 카메라에 담아 그것을 화폭에 그리는 경우들을 보는데 나는 별로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왕에 여행을 하고 풍경을 담으려면 발품을 팔아 사람들이 닿지 않는 곳에도 가보고, 아무도 보지 않는 것들을 만나보고 그것들을 재구성해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평론가 신항섭 선생도 선생의 그림에 대해 ‘채색주의’라는 평가했습니다. 그분의 말을 빌리자면 ‘미적 감각은 순수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풍경이든 정물이든 현실 색에 얽매이지 않고, 자의적인 색채 배열로 현실로부터 독립된 회화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는데 특별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채색에 대한 특수함을 지적한 것인데, 이 부분을 직접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처음부터 진지한 질문 때문인지, 얼굴에 웃음기를 지운 채 양손을 움직여 큰 동작을 만들며 설명에 들어갔다.
“구상회화의 매력은 색채입니다. 사물의 형체는 화가라면 다 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색채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눈으로 보여 지는 색채 말고 화면에 맞는 색을 찾아 그림에 불어넣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제 채색의 지론입니다.”
“그것은 사물의 고유한 색깔을 무시한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요?”
“그렇습니다. 그림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 가슴속에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사진과 같은 색채로서는 약합니다. 각각의 물체나 풍경이 갖고 있는 색을 찾아내 강조함으로써 그 색채가 마음을 흔들어 깨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될 수 있는 한 사물의 고유색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선생의 대답은 확실히 파격적이다. 일반적으로 자연의 색을 그래도 아니면 좀 더 확실하게 표현하는데 선생은 느낌을 주는 색채를 만들어낸다고 하니 말이다. 이것은 인상파(The impressionists) 화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었던가?
“선생의 이러한 바탕은 어떻게 형성되었다고 보십니까?”
“제 그림은 자연주의에서 출발해 18세기 인상파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림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 역사를 보면 80년대에는 정치적인 성향을 반영한 민중미술(民衆美術) 활동이 활발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군사정권의 퇴조와 함께 소멸되어 다원주의(多元主義)로 바뀌었습니다. 저도 그 시대를 살았으므로 그런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런 그림은 한두 점으로 족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그림은 편안하고 아름답고 희망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연주의 쪽으로 굳어졌습니다. 21세기 들어 건축이나 모든 예술이 단순화되고 현대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저는 구상이면서도 단순하고 현대적인 작품을 그려낼 것이냐를 과제로 삼고 작업했습니다.”
선생의 대답처럼 그의 그림은 일상이면서 다른, 다르면서도 같은 느낌을 주는 특성이 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창의적이며 의도적인 배치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풍경화는 물론 정물이나 인물화에 있어 그 포즈나 배경은 전체적 조화를 위해 조밀하게 계산되어 배치한 것들이다. 이것이 그림의 완성도를 높이는 기법이다.
또 그림이 갖고 있는 색채 역시 일상의 색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데, 전체적으로 큰 터치임에도 불구하고 배색과 혼합, 터치의 기술이 완벽한 채색을 만들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밀고 나가는 능력을 보인다. 결국 세필을 통한 정밀묘사가 줄 수 있는 작은 설명을 생략하여 그 그림이 담고 있는 주제의 내면을 깊이 음미할 수 있는 상상력을 자극해내고 있다. 이 때문에 선생을 신자연주의(新自然主義) 화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선생은 말한다.
“풍경화나 정물화에서 모든 그림은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점과 선의 굵기와 거리, 면과 색, 면의 크기 등을 충분히 생각하고 계산해서 그려야 합니다. 스케치 여행을 많이 다니지만 결국은 내가 본 대상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그림이 그려집니다.”
"다작 통해 터득한 독창성 키워"
김일해 선생은 교육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엄격하게 자랐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림을 잘 그린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부친은 미술전공을 반대했다. 가출 등의 반항을 통해 겨우 사범대학에 입학하는 조건으로 미술공부의 길을 뚫었다. 대학에서 배운 이론은 흥미가 없었다. 교수들이 가르쳐준 사실적 화풍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군복무를 마친 선생은 칩거하며 독창적 화법에 매달린다. 그 시기에 대해 선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학 4학년 때부터 3년간 나는 매월 3천 호 정도를 그렸습니다. 그림이 되든 아니든 마구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작업에 미친 것입니다. 두문불출하고 그림만 그리다보니 판단기준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생은 그 후 1981년부터 83년까지 목우회 공모전 특선, 1983년부터 연 3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 특선을 차지함으로 실력을 인정받게 된다. 다작을 통한 자기 그림이 대구의 이름 없는 화가를 중앙에서 주목받는 화가의 이름을 얻게 했다. 선생은 이후 변종화 선생을 만나 미술에 대한, 또 미술계에 대한 도움의 말을 들으며 1987년 서울로 올라와 전업작가로서 작업과 전시회에 전념한다. 그리고 신세계미술관과 선화랑, 일본 동경 진출 등 활발한 활동을 통해 지평을 넓혀간다. 선생은 변종화 선생과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처음 만나자고 할 때는 화풍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2년 정도를 미루었습니다. 그러다가 대구에 내려올 기회에 선생을 만나 많은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나는 변종화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 그림에 대해 충고를 들었거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프로작가정신을 배웠습니다. 대학에 있다가 프랑스에서 그림을 공부하신 변 선생님은 ‘덮어놓고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되고, 수십 명이 전시를 해도 보는 사람에게 감동 즉, 느낌을 전달하는 화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돈을 주고 샀을 때 돈이 아깝지 않도록 하는 그림을 그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봐도 좋고 50년, 100년 후에 봐도 느낌을 줄 수 있는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씀이 제게 양약이 된 것이죠.”
선생은 이제 ‘마음이 가면 손은 따라가며 그림을 그려내는 경지’라고 했다. 그림은 누구에게서 배웠다고 되는 것이 아니란다.
“타고나면 좋겠지만 노력이 최상의 방법입니다. 노력하는 일을 통해 캔버스를 많이 없애고, 물감을 없애야 합니다.”
미술학도들에게 있어 많은 시간을 투자한 노력만한 스승이 없다는 말이리라.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