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각종매체와 기발한 재료들의 범람, 작품의 순박한 순수성 보다는
관객들의 순간적 흥미와 충격이 공존하는 현대 미술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라는
근본적인 명제는 무엇을 말하는가?
더 이상 그린다!
라는 단어는 흥미나 충격과는 거리가 먼 것인가?
아니다!
여기 수수한 인상 뒤에 날카롭게 세상을 둘러보는 한 작가의 시선을 소개 하고자 한다.
작가 유창숙의 작품은 크게 두 번의 변화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첫 시기 그림은 사물의 표피와 형태를 우선시 하는 작가로서의
준비기간 이었다면
두 번째 시기는 그 시간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작가만의 공간이다.
이런 모습은 그리 길지만은 않은 필자와 작가와의 만남에서
실로 놀라울만한 변화이며 일종의 變態(변태)였다.
작가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시간과 공간의 상호 작용 속에
머무르는 작가의 시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대를 공존하는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공간이라 칭하고
무수한 공간속 한 개인의 시선에 시간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조형예술에 있어 창작활동은 시간과 공간에 연관된 인간의 정신적 활동으로
그 기초를 인간의 심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것을 내적인 심상 상징화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작품의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공간은 시간과는 분리해서 생각 할 수 없는 개념으로 정리되며
이러한 성질에 근거하여 시. 공간이라는 복합개념으로 발전되어 왔다.
즉 회화의 개념에서도 시간을 공간을 위한 보조적인 문제의 것이 아니라
시간을 주된 문제 또는 공간과 동등한 입장으로 보아야할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즉 머물러 있지만 움직임이 있고 같은 공간을 인지하되
각기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유창숙의 작품 앞에 한참을 물끄러미 서있노라면 뒤에서
조용한 재잘거림이 어깨 넘어 들려오는 듯하다.
텍스트의 뒤바뀜으로 보아 분명 절반의 풍경은 보는 이의 반대의 것이다
이내 그 재잘거림은 커다란 도시의 역동적인 굉음으로 바뀐다.
뒤로는 거대한 도시의 움직임이 있고 관객이 바라보는 풍경에는 아늑함이 있다.
문고리... 뜬금없는 꽃줄기...마치 열쇠와도 같은 작은 사물에 멈춰
잠시 시선을 쉬게 하고 다시 작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내 평화가 찾아온다.
현실적 사물들의 용도나 쓰임새를 모두 이탈하고 사물을 현실공간과
전혀 다른 공간으로 조합하는 식의 방법이 초현실주위에서 보여 지는
데페이즈망(depaysement)의 특성이라면 유창숙의 작품에서 보여 지는
사물의 낯선 배치는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있어도 아니 있을법한 사물이며
전혀 낯설지도 어색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조용히 배치되어 있다.
이에 우리는 작가가 꿈꾸는 세상은 이상주의도 환상속의 가상공간이 아닌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을 엿보게 된다.
마치 화려한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조금 전
머물다간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는 공간처럼 아련함이 남는다.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人間愛(인간애) 가득한 작품이라고나 할까?
작가는 물감이 지니는 두터운 물질성을 선택하기 보다는
정밀한 면 처리와 화려한 색감을 선택하였다.
작품 이면에 나타나는 작가의 이중적 시선이나 계산된 화면의 분할이야
섬세한 작가의 성품에서 나오는 특징이라 하더라도 작가 유창숙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작가들의 그림 못지않게 화려하고 세련미가 넘친다.
작가의 수많은 경험과 삶 좌절과 희망이 지금의 작가가 되는 토양이 되었음을
의심하지 않는 바이며 우리가 어느 누군가의 삶이 녹아 있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에 긍정적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작가 유창숙의 작품은 우리가 반드시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형태 일 것이다.
서양화가 김 근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