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들지 않는 사랑]
- 이승희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날들
그래 있었지
죽고 난 후엔 더 이상 읽을 시가 없어 쓸쓸해지도록
지상의 시들을 다 읽고 싶었지만
읽기도 전에 다시 쓰여지는 시들이라니
시들했다
살아서는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생겨나고 있다고
내가 목매달지 못한 구름이
붉은 맨드라미를 안고 울었던가 그 여름
세상 어떤 아름다운 문장도
살고 싶지 않다로만 읽히던 때
그래 있었지
오전과 오후의 거리란 게
딱 이승과 저승의 거리와 같다고
중얼중얼
폐인처럼
저녁이 오기도 전에
그날도 오후 두시는 딱 죽기 좋은 시간이었고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울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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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일을 회상(回想)하는 것은 청춘의 한 시절을 지나 완숙함의 길목에 접어들 때쯤일 것이다.
이승희 시인의 시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는
한 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 붉게 핀 맨드라미 같았던
어떤 시절의 격렬함을 떠올리게 한다.
누구에게나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 어떤 아름다운 문장도/살고 싶지 않다로만 읽히던 때”의 찬란한 방황들.
한 생을 다 바쳐서 무언가를 이루고 싶었던 때의 꿈과
사랑과 좌절의 지독한 시절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래 있었지”라는 말로 압축되는 게 삶의 순리인 듯하다.
‘폐인’처럼 중얼거리며 “오전과 오후의 거리”를
“이승과 저승의 거리”처럼,
“딱 죽기 좋은 시간”처럼
배회하던 맨드라미 같은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완숙함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최선을 다해” 울어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최선의 울음으로 맨드라미의 붉은 꽃을 피워 올렸던 옛날,
그 때는 참 아름다웠다.
쓸데없어 보이는 일로 때로는 무모한 일로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날들”을 건너왔던 맨드라미꽃 같은
청춘의 표정.
그것이 낭만이고 사랑이었다.
방황을 삶의 낭비로 생각하는 실용(實用)의 시대는 건조하고 삭막하다.
그 사막에 꽃을 피워줄 ‘환장’의 낭만이 절실한 시절이다.
신종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