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ea of My Mind >
입체감 있는 파도의 결부터 무한한 공간감의 낭만성까지 인간의
내면 깊숙히 품은 안위와 평온함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말을 멈추고 눈을 키운다.
아스라한 수평선 끝에 걸쳐 있는... 뭔가가 보일까 해서. 그러다가 이내 깨닫는다.
정작 저 끝에 아른거리는 건 섬도 아닌,
고래도 아닌
내 마음이란 것을.
머물 수도 뛰어놀 수도 없는 참으로 막막한 내 마음이란 것을.
명상을 품은 듯 화면 속에 아득하게 펼쳐진 그의 바다는 수평의 구도,
자연을 닮은 색채, 생명력 있는 물결들이 조화롭게 뒤섞인 곳이다.
역동성을 품은 생기있는 색들의 조합은 몽환적인 풍경을 자아내고,
완벽한 그라데이션과 원근감은 보는 이를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어떠한 방해도 없고 끝도 가늠할 수 없는 이 거대한 자연 앞에서
유일한 존재는 '나'뿐이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은 심리적인 안정감과 균형감으로 몰입감을 유도하며
마음의 위로는 물론 종교적 거룩함까지 느끼게 한다.
오병욱의 바다는 말없이 그 자태만으로 대담함을 내포하며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 주는 경건한 울림을 내보인다.
독창적인 형태, 개성 있는 색채, 독보적인 표현방식으로 긍정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작가 오병욱(63)의 바다가 그렇다.
30여년, 바다 쪽으로 붓을 향해온 작가의 그림에는 어느덧 현실 너머의 세상이 아른대고 있는 거다.
잔잔하지만 꿈틀거리는, 작은 파도의 고즈넉한 흔들림을 기록하는 작가의 바다그림은
물과 빛이 어울려낸 투명함이 특징이다.
절대 흥분하는 법이 없고 절대 요동치는 법이 없다.
그저 파도에 걸친 하늘이 머금은 색과 시간의 변화에 몸을 맡길 뿐이다.
마치 영원처럼 이어질 듯한 그 순간을 위해 작가는
캔버스에 수십, 수백번 물감을 뿌리는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다.
작가가 대중에 이름을 알린 건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다.
청와대에서 방명록을 쓸 때 그의 등 위로 작가의 ‘바다그림’이 걸려 있었다.
‘내 마음의 바다’(Sea of My Mind #220107·2022)는 하늘과 바다가 한몸이 된 작가의 대표연작 중 한 점.
2m를 훌쩍 넘긴 심연의 수평선이 지나가는 발길을 기어이 불러세운다.
섬세하고 반복적인 붓질로 바다를 묘사하는 오병욱작가의
평온한 바다, 해 뜨기 전의 바다, 해 진 바다, 바람부는 바다 등
다채로운 바다 풍경이지만 실재하지 않는 ‘마음의 바다’이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점묘로 표현한 바다가 우주처럼 느껴진다.
서양화단의 거장이었던 할아버지 오지호(1905~1982)와 예술원 회원인
아버지 오승우(80) 화백에 이어 3대째 화업을 이어가는 작가는
특유의 질감을 표현하는 붓질의 거친 마티에르를 형성한다.
오병욱
1958~
<동국대학교 서양화과 교수>
파리제8대학교 대학원 조형미술학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석사
서울대학교 회화과 학사
예술의전당 전시예술감독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서양화과 교수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큐레이터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 조교수, 부교수 역임
서울대학교 미술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 파리Ⅷ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회의 개인전과 북경 비엔날레등 수십회의 단체전에 참가.
1997 광주 비엔날레특별전을 기획,2007년 예술의전당 미술감독 역임.
1992-2000 원광대학교 미술대학교 교수. 현재는 동국대학교 예술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이다.
<평론>
박영택 / 미술비평
수평의 바다. 바다를 본다.
텅 빈 바다는 가물가물한 수평선만을 던져줄 뿐 우리의 눈을 잠시 공허에 빠뜨린다.
바다는 헤아릴 수 없다는데 그 매력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실측과 시측의 경계에서 훌쩍 벗어나 있다.
시작과 끝을 한 눈에 보여주지 않기에 인간은 다만 그 한 자락만을 단서로 삼아 무한함을 체득한다.
모든 이미지, 풍경은 결국 우리가 보았던 기억에 의존해 보여진다.
오병욱은 가로로 길게 이루어진 캔버스 화면에 물감을 무수히 뿌려 올린
자국으로 바다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3분의 2, 혹은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자리에 사라지는 수평선을 중심으로 바다는 형성된다.
자잘한 점들이 부딪치고 흐르고 엉긴 자취들,
요철을 이루는 물감의 덩어리들이 얹혀진 하단이 어느덧 하늘이 되고 바다가 되었다.
붓의 방향과 각도를 달리하면서, 물의 농도를 조율하면서 뿌려지고 그렇게 섬세하게 밀착되어 올려진 입자,
점들이 모여 이룬 이 바다는 빛과 더불어 항상 변모하는 질료로 존재한다.
오병욱은 이렇게 바다를 쉼 없이 변화 생성하는 존재로 부각시켰다.
어두움이나 흐릿한 안개를 뚫고, 미분화된 세계의 빛에 의해 비로소 하늘과 분리된 바다는
단단한 질료와 희박한 질료를 끝없이 오간다. 그 피부 위로 인간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색들이 시시각각 발산한다
한 개인의 섬세한 신경줄과 섬약할 정도의 민감한 정신의 지진계로 포착한 이 바다의 풍경은
전적으로 빛과 색에 의지해 드러난다.
빛은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다.
작가의 관심은 재현 대상이 아니라 빛 자체이며,
이미지의 어원에는 빛이란 단어가 숨겨져 있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볼 수 없고 이미지 역시 없다.
그러니까 모든 이미지는 빛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그 빛을 심리적인 차원으로까지 끌고 가 그림을 우수와 낭만,
감성적인 차원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새삼 우리 눈앞에, 몸 앞에 광막하게 펼쳐진 바다를 불러 눕힌다.
그리고 침묵과 고요함으로 가라앉는 수평에의 의지를 권하고 있다.
<작가와의 대담>
오랜 시간 그려온 바다는 작가님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실제 바다를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바다에 대한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산, 나무, 들판 등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다른 대상과는 달리 바다는 보고 싶다,
라는 지점이 있습니다.
일망무제(一望無際)라는 말처럼 아무 제한 없이 저쪽 수평선 끝까지 보이는 장대한 거리감 때문인가?
사람들은 바다를 바라보면 시원하게 느끼고 위로 받게 되는 것 같아요.
일상에 지쳐있다가도 바다를 보는 순간 잡다한 순간을 모두 떨쳐낼 수 있는 것이 바다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이 진행되는 과정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진짜 바다처럼 반짝이고 입체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싶었어요.
어떻게 반짝거리는 것을 잘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울퉁불퉁한 표면을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캔버스에 미디엄을 섞어 넓적한 붓으로 두들겨서 입체적인 표면을 낸 후
서너 번의 젯소칠과 컬러링을 해서 베이스를 만듭니다.
그 후 붓으로 가느다란 입자의 물감을 수십 번 겹쳐 뿌리죠.
그러면 요철같이 튀어나온 부분은 물감이 묻어 반짝이고 밑에 부분은 묻지 않아
자연스러운 명암과 입체감이 생깁니다.
내가 사용하는 물감(골덴 인터퍼런스 아크릴 물감)을 빛의 삼원색으로 섞으면
갈치 비늘과 같은 반짝이는 흰빛을 냅니다.
그렇게 섞은 물감을 뿌리는 횟수를 조절하며 밝기와 레이어를 조절합니다.
완성된 작품은 빛에 예민한 물감의 특징 때문에 자연광과 조명에 따라 달라지고,
날씨에 따라 달라지고, 아침 저녁으로 달라지는 그림이 됩니다.
여러 각도에서 바라봐도 빛이 나고 밤에도 빛을 내는 바다라고 생각하곤 해요.
작가님의 바다는 복잡한 그림이 아님에도 오래 감상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 하시나요?
작품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으면 앉아서 오랫동안 그림을 보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나의 바다는 어쩌면 감정의 도화선 같은 것이에요.
그 폭발은 작품을 본 사람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죠.
작품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자기가 본 바다의 기억을 꺼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바다의 색과 비교해 보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과 파도 소리, 바다 냄새를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머릿속의 감성들과 시각적 요소들이 밀물 썰물처럼 만나고 멀어지는 것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해요.
작품 안에서 각자의 바다를 꺼내어 생각하며 지켜보는 것 같습니다.
물의 모양에 따른 다른 울림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물의 가변성을 화폭에 담았다는 이야기도 상당히 과학적이고 재미있습니다.
물을 그리는 행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물처럼 움직이는 것들은 모양도 다 닮아 있어요.
실핏줄, 나뭇잎의 잎맥,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본 나일강 지류들 모양이 보면 비슷합니다.
물이 스스로 잘 흘러가도록 진화해 나가는 게 있어서 그런지
물이 흘러가 모양 대로 난 파이프 모양들은 비슷한 것 같아요.
물은 소리나 모양 흐름들로 우리에게 많은 느낌들을 줍니다.
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듣거나 모양 보면 물의 움직임을 느낄 수가 있는 것 같아요.
물이 주는 동조 효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물이 가진 이런 성질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합니다.
예전부터 강가나 바다에 앉아서 사람들은 마음을 다스리곤 했잖아요?
물은 분명 사람의 마음을 치유해 주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빨간 양철지붕 아래서>라는 교수님의 산문집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특히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이 아이의 5세 때부터 오감을 자극해 주는 아빠의 모습이었습니다.
각별한 사랑과 교육관으로 키운 아들도 결국 아들도 주목받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상주에서 오영준 화가님과 지내시는 일상이 궁금합니다.
산문집은 절판되었다가 작품 안에 나온 청설모와 호두나무 부분이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다시 나오게 되었습니다.
다섯 살 때부터 화가가 되겠다던 아들은 나와 같은 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해 선후배 사이가 되었어요.
형상화 된 그림은 아들이 나보다 잘 그립니다.
작품에 대한 말은 서로 많이 아끼는 편입니다.
작업은 나의 작업실 옆 교실을 나눠서 작업하고 있어요.
같이 도시락을 싸 들고 학교로 출근합니다.
나는 물을 그리고 아들은 나무를 그립니다.
우리의 작업은 오행적으로도 맞는 것 같습니다.(웃음)
작품 활동을 하지 않을 때는 나무를 만지거나 책을 읽어요.
작가라는 직업이 본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수 있어야 하는 직업이라서
예전부터 여러 종류의 다양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목공도 책을 읽으며 독학을 하다 보니 원서를 포함한 목공 책들을 3-400권은 읽은 것 같습니다.
작업실 한 방에는 대패, 망치, 도끼, 자귀 등 목공 연장으로 가득 차 있어요.
기계 작업은 별로 안 좋아하고, 수공으로 하는 작업들을 좋아해요.
나무를 다루는 것, 특히 대패질은 묘한 중독성이 있어요.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추상화를 그려오셨어요.
작가님이 추상화 작업을 하실 때 고민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이는 내 그림을 추상이라 하고 어떤 이는 구상이라 말하기도 해요.
추상과 구상의 경계적 작업이라고 보는 이도 있는데 제 작품은 추상이 맞습니다.
추상미술의 특징 중 하나가 애매모호함입니다.
추상은 쉽게 설명 되서는 안된다는 생각인데 그래서 추상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 중에
‘추상화를 하나의 사이클로 보자면 나는 반쪽만 창조하고
나머지 반쪽은 보는 사람이 해석을 만들어 붙이면서
전체 창조의 사이클을 완성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추상화가 형상이 없기 때문에 작가는 커튼 뒤에 숨어서 자기들끼리 속닥거릴 뿐이고,
책임감이 없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추상화로 내면 세계의 충격과 감동을
어떻게든 전달해 보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현대미술의 추상화는 복잡한 화면 구성들이 많아요.
복잡하면 이게 뭐지? 하면서 그때부터 머리가 돌아가는데,
단순하면 한순간에 가슴을 쿡 찌릅니다.
나는 가슴에 와 닿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형상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장 단순한 바다를 선택했습니다.
그렇다면 작가님이 생각하는 좋은 그림은 무엇인가요?
내가 생각하는 좋은 그림은 미인과 같아요.
첫눈에 확 띄고 가까이 가서 봐도 대단하구나,
멀리 떨어져 어떤 각도에서 봐도 대단하다고 느끼는 그림입니다.
자꾸 쳐다보고 싶고, 헤어졌는데도 생각만 하면 여운이 남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림을 보고 난 후 집에 돌아와 생각해도 아른아른한 여운이 남는 그림이 좋은 그림입니다.
너무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계속 보고 싶은 그림,
멀리서 가까이로, 좌에서 우로 자꾸만 보게 되는 그림, 기분 좋은 상념, 여운,
출렁거림이 가슴 속에 계속 남아있는 그림,
그래서 그 그림을 생각하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그림.
나는 수십 년간 그런 그림이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했어요.
30년 넘는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셨어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예술가의 역할이 궁금합니다.
예술가, 성직자, 교육자들은 세계의 혼탁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깨끗하고 맑고 고귀한 것들을 가지고 가꾸어서 열린 창문, 따뜻한 달빛처럼
다른 이들을 다독여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시대에 넘쳐나는 것을 깎아내고, 모자라는 것을 채워 넣는데
주로 정신적인 것을 책임진다고 생각해요.
내가 특히 좋아하는 작가 이중섭은 아름다운 그림이 아닌 훌륭한 그림을 그렸어요.
찬물에 몸을 씻고 좋은 그림을 그리게 해달라고 바위산에서 종종 기도를 했습니다.
아름다운 그림의 문제가 아니고 진선미가 통합되는 그림을 그렸던 것입니다.
신선한 바람, 예술 정신, 순수에 대한 열망들로 스스로를 채워
시대의 아픈 부분을 조명해 위로하고 약한 부분을 보강해 주는 치료사 같은 역할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