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무의식의 저 밑바닥에 고여있는 삶의 앙금들, 인식가능하지 않은 방식으로 축적되고 연관되어져 있는 기억의 소자들, 작가에겐 그것들이 ‘마음의 본질’이자 ‘진아(眞我)’의 질료다. 그에게 표현행위란 그것들 중 일부가 외부의 빛에 노출되도록 하는 것, 또는 존재의 수면 위로 떠오르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회화는-때로 사진은- 무의식과의 대화를 주선하는 매력적인 중개자가 된다. 그의 회화가 자주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으로 명명되는 일련의 표현술, 즉 내부에 유폐된 존재의 단서들을 표출시키기 위해 이성과 판단의 인위적 정지와 심리의 자동기술에 의존하는, 방식을 차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떻든 작가는 하나의 견고한 스타일, 회의 없는 양식적 확신을 다른 종류의 심각한 위험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사유를 관통하는 질문의 다음과 같은 너른 스펙트럼을 생각할 때, 그러한 판단은 이해가지 못 할 바 아니며, 때론 불가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허진호의 세계를 적시할 어떤 명확한 미적 개념이나 형식의 범주를 논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다. 그만큼 그의 작품들이 존재의 매우 폭 넓은 의미를 파헤치는데 여전히 매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삶을 몸으로 느끼고, 영원을 사유하고, 삶과 죽음의 심오한 의미 층을 헤아린다. 그리고 실존의 아픔 한 가운데서 잉태되는 회복의 소중한 귀결들로서 ‘자유, 사랑, 평화’를 긍정한다. 이 성실한 긍정의 태도야말로 이제까지의 성과를 의미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 현재적 성과를 넘어서는 결과를 기대하도록 만드는 요인일 것이다 |